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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근 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이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릴게임몰
1982년 한국 육상계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육상 단거리 200m에서 장재근이 '깜짝 금메달'을 목에 건 것. 한국 육상 단거리 역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메달 불모지였던 육상에서 그의 기적 같은 금메달 소식은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무명 선수였던 장재근은 이날을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기점으로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로 거듭났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메달을 딴 데 이어 같은 해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200m에선 20초 41로 아시아 신기록이자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장재근이 세운 아시아신기록은 13년 만에, 한국신기록은 강산이 세 번 변한 33년 뒤에야 0.01초 차로 간신히 깨졌다.
바다이야기온라인 선수 시절엔 '최초'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여러 차례 '한계의 벽'을 깨부쉈고, 은퇴 후엔 에어로빅 강사로 변신해 다이어트 열풍을 불러일으킨 뒤 현장으로 돌아가 지도자로 거듭났던 장재근을 지난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현역시절 장재근(맨 앞) 야마토게임연타 . 한국일보 자료사진
"운동하자니 실력은 없고..." 미미했던 레전드의 시작
지금이야 '육상 레전드'로 꼽히지만, 장재근의 시작은 매우 미미했다. 처음 접한 운동은 배구였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수창초등학교(당시는 수창국민학교) 4학년 때 교내 배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구부에서 섭외가 들어온 것. "체육복과 운동화를 준다는 말에 배구를 시작했다"던 장재근은 "촌스럽고 질 나쁜 체육복이었는데도 등에 '수창국민학교' 라고 써진 그 체육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배구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집에서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반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초등학교 3년간 공부를 멀리했던 탓에 도저히 학습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육상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3,000m 장거리가 주였는데, 긴 거리를 뛰어본 적이 없는 장재근은 매번 꼴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운동을 하자니 실력은 없고, 공부는 일찍이 때려치웠어서 난감했다"는 그의 말대로 진퇴양난의 시기였다. 중학교 3학년 때 100m 허들로 종목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건 운동밖에 없는데, 운동으로 뭘 해보기엔 여러모로 실력이 부족했다.
장재근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출발 신호와 함께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다. 당시 장재근은 한국 단거리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술이나 배우라"는 아버지 일침에 '죽기 살기'로 도전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장재근에 채찍질을 가한 건 아버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비전이 없는 것 같으니 운동 그만두고 기술이나 배우라"며 일침을 가했다. 장재근은 "이때 처음으로 운동을 죽기 살기로 해봐야겠다 생각했다"며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겠다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고3 때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남자 200m 1위를 휩쓸었다. 장재근의 엄청난 성장세에 대학 러브콜도 쏟아졌다.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던 고등학교 진학 때와는 180도 달라진 상황에 어리둥절해진 장재근은 당시 전남대로 향했다가 성균관대로 편입했다.
장재근(가운데)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남자 200m 우승 후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시아 치타'의 탄생... "연습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장재근의 선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한 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부터다. 당시 성균관대 3학년이었던 장재근은 대회 전까지 크게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100m 결선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자 관중들의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내친김에 200m는 예선부터 바짝 속도를 내겠단 생각으로 덤볐다. 이 종목 우승이 유력했던 일본 선수의 기를 초장에 꺾으려던 전략이다. "일본 선수한테만은 지고 싶지 않았다"며 열의를 불태운 장재근은 결선까지 지치지 않고 내달렸고, 결국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어떤 기술을 갖고 있었다기보단 연습량으로 승부를 했던 것 같다"며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당시 장재근의 선수촌 생활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훈련으로 가득했다. 복싱부를 따라나선 새벽 훈련에서 운동장을 10바퀴씩 돌았고, 이것만으로 모자라 홀로 무릎 올려 뛰기도 100m씩 뛰었다. 이후 잠시 자고 일어나 오전 9시 30분부터 웨이트로 몸을 다지고, 점심 식사 후 쉬었다가 오후 3시에 운동을 나가는 일정이었다. 장재근은 "운동을 하루 세 타임씩 하면 하루가 다 간다"며 "다른 단거리 선수들과 달리 다양한 운동을 많이 했고, 그렇게 힘을 길렀던 게 큰 대회에서 빛을 발한 것 같다"고 돌아봤다.
장재근(맨 왼쪽)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200m에서 1위로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찬란했던 장재근의 리즈시절,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장재근은 얼마 뒤 미국으로 떠났다. 1984년 LA 올림픽 때 다친 허벅지 재활 겸 훈련을 위해서였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탓에 돈 걱정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장재근은 또 한 번 진화했다. 미국에선 무릎 각도부터 하나하나 세세하게 분석했고, 제각기 몸에 맞는 자세와 기록이 나올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훈련의 결과는 확실했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재근은 "아시아 선수가 세계대회 트랙에서 딴 첫 번째 메달이라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며 "아시아 사람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깨부순 거라 내 스스로도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그해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에선 남자 200m를 20초 41로 주파하며 아시아 신기록이자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1986년엔 대망의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200m 금메달을 거머쥐며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장재근은 "당시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져 솔직히 부담스러웠다"며 "경기 전 잔디에 엎드려 체조하면서 마음속으로 온갖 신들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었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장재근의 시대'가 막을 내린 건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다. "연습 때만 해도 3등은 할 것 같았다"던 그는 대회 200m 결선에서 7등에 그치자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아시아 1등이 아니면 다 소용없다. 메달마저 못 딸 것 같으면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에어로빅 강사 시절 장재근. 한국일보 자료사진
에어로빅·홈쇼핑 쇼호스트로 잠시 '외도'
은퇴 후 장재근은 소속사였던 한국전력 장위동 지점으로 자리를 옮겨 요금 관련 부서에서 일을 했지만, 트랙을 달리던 그에게 사무실 근무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월급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육상 코치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개국을 앞둔 SBS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에어로빅을 해보자는 것. 장재근은 "하루 일당이 10만 원인데, 주 5일짜리라 수입이 괜찮았다"며 "딱 1년만 하고 호주로 유학 갈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떠나지 못했다. "돈을 너무 많이 벌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됐던 것 같다"던 장재근은 "2년쯤 하고 나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고민 끝에 육상으로 돌아가 심판을 봤다. 초반엔 "돈 벌겠다고 홀딱 벗고 에어로빅하던 놈이 이제 와서?" 라는 시선이 없지 않았지만, 1년 정도 지나니 육상계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어로빅을 하던 시절 행사 1개만 뛰어도 수백만 원을 벌던 그에게 일당 5만 원짜리 심판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주말에 홈쇼핑 쇼호스트를 하며 생활에 필요한 돈을 보태다 다시 육상을 떠났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단거리 대표팀 코치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9년 대한육상경기연맹 트랙기술위원장 시절 마침내 위원장 일에만 전념했지만, 이때는 연맹과 갈등하다 물러났다. 다만 이 시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김국영(당시 안양시청)이 31년 만에 100m 한국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장재근은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장재근 전 진천선수촌장이 지난해 8월 프랑스 파리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선수단 결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파리=서재훈 기자
지도력 인정받고 진천선수촌장까지
2019년 서울시청 육상팀 감독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친 장재근은 2023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으로 복귀했다. "고향 같은 선수촌을 제대로 된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의지를 불태웠지만 △새벽 훈련 △산악 구보 △밤 12시 인터넷 차단 등을 단행했다가 '구시대적 프로그램'이라는 반발을 샀다. 장재근은 "막상 선수촌에 가보니 숙소를 PC방처럼 꾸며놓고 밤새 게임을 하거나 밤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선수들도 꽤 있었다"며 "오죽했으면 '진천리조트'라는 말까지 나왔겠느냐"고 한탄했다.
칼을 빼든 장재근은 "선수촌은 세금으로 나라를 대표할 선수를 기르는 곳이지 편하게 놀면서 몸 만들러 오는 곳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지도자와 선수들의 불만은 물론이고, 부모 민원까지 쇄도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랏돈으로 호의호식하려거든 나가라"고 했다.
장재근은 그렇게 역대 최저 성적이 예상됐던 2024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로 전체 8위로 이끌며 2년 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2월 퇴임식을 가진 장재근은 여전히 현장이 고프다. 그는 "아직 내가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촌장직을 하면서 행정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며 "언제든 현장으로 돌아갈 준비는 다 돼있다. 내가 필요한 순간에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기자 admin@reelnara.info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장재근 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이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 스튜디오에서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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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국 육상계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육상 단거리 200m에서 장재근이 '깜짝 금메달'을 목에 건 것. 한국 육상 단거리 역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메달 불모지였던 육상에서 그의 기적 같은 금메달 소식은 한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무명 선수였던 장재근은 이날을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기점으로 아시아 최고의 스프린터로 거듭났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아시아 선수 최초로 메달을 딴 데 이어 같은 해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200m에선 20초 41로 아시아 신기록이자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장재근이 세운 아시아신기록은 13년 만에, 한국신기록은 강산이 세 번 변한 33년 뒤에야 0.01초 차로 간신히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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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육상 레전드'로 꼽히지만, 장재근의 시작은 매우 미미했다. 처음 접한 운동은 배구였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수창초등학교(당시는 수창국민학교) 4학년 때 교내 배 바다이야기게임방법 구부에서 섭외가 들어온 것. "체육복과 운동화를 준다는 말에 배구를 시작했다"던 장재근은 "촌스럽고 질 나쁜 체육복이었는데도 등에 '수창국민학교' 라고 써진 그 체육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배구부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집에서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반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초등학교 3년간 공부를 멀리했던 탓에 도저히 학습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육상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3,000m 장거리가 주였는데, 긴 거리를 뛰어본 적이 없는 장재근은 매번 꼴찌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운동을 하자니 실력은 없고, 공부는 일찍이 때려치웠어서 난감했다"는 그의 말대로 진퇴양난의 시기였다. 중학교 3학년 때 100m 허들로 종목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건 운동밖에 없는데, 운동으로 뭘 해보기엔 여러모로 실력이 부족했다.
장재근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출발 신호와 함께 빠르게 달려 나가고 있다. 당시 장재근은 한국 단거리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술이나 배우라"는 아버지 일침에 '죽기 살기'로 도전
어중간한 위치에 있던 장재근에 채찍질을 가한 건 아버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비전이 없는 것 같으니 운동 그만두고 기술이나 배우라"며 일침을 가했다. 장재근은 "이때 처음으로 운동을 죽기 살기로 해봐야겠다 생각했다"며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겠다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고3 때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남자 200m 1위를 휩쓸었다. 장재근의 엄청난 성장세에 대학 러브콜도 쏟아졌다.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던 고등학교 진학 때와는 180도 달라진 상황에 어리둥절해진 장재근은 당시 전남대로 향했다가 성균관대로 편입했다.
장재근(가운데)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남자 200m 우승 후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시아 치타'의 탄생... "연습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장재근의 선수 인생에 본격적으로 꽃이 피기 시작한 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부터다. 당시 성균관대 3학년이었던 장재근은 대회 전까지 크게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100m 결선에서 은메달을 거머쥐자 관중들의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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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당시 장재근의 선수촌 생활은 새벽부터 오후까지 훈련으로 가득했다. 복싱부를 따라나선 새벽 훈련에서 운동장을 10바퀴씩 돌았고, 이것만으로 모자라 홀로 무릎 올려 뛰기도 100m씩 뛰었다. 이후 잠시 자고 일어나 오전 9시 30분부터 웨이트로 몸을 다지고, 점심 식사 후 쉬었다가 오후 3시에 운동을 나가는 일정이었다. 장재근은 "운동을 하루 세 타임씩 하면 하루가 다 간다"며 "다른 단거리 선수들과 달리 다양한 운동을 많이 했고, 그렇게 힘을 길렀던 게 큰 대회에서 빛을 발한 것 같다"고 돌아봤다.
장재근(맨 왼쪽)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200m에서 1위로 결승점을 통과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찬란했던 장재근의 리즈시절,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친 장재근은 얼마 뒤 미국으로 떠났다. 1984년 LA 올림픽 때 다친 허벅지 재활 겸 훈련을 위해서였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탓에 돈 걱정 없이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장재근은 또 한 번 진화했다. 미국에선 무릎 각도부터 하나하나 세세하게 분석했고, 제각기 몸에 맞는 자세와 기록이 나올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훈련의 결과는 확실했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재근은 "아시아 선수가 세계대회 트랙에서 딴 첫 번째 메달이라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며 "아시아 사람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깨부순 거라 내 스스로도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그해 자카르타 아시아육상선수권에선 남자 200m를 20초 41로 주파하며 아시아 신기록이자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1986년엔 대망의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200m 금메달을 거머쥐며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장재근은 "당시 나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져 솔직히 부담스러웠다"며 "경기 전 잔디에 엎드려 체조하면서 마음속으로 온갖 신들에게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었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장재근의 시대'가 막을 내린 건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다. "연습 때만 해도 3등은 할 것 같았다"던 그는 대회 200m 결선에서 7등에 그치자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아시아 1등이 아니면 다 소용없다. 메달마저 못 딸 것 같으면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에어로빅 강사 시절 장재근. 한국일보 자료사진
에어로빅·홈쇼핑 쇼호스트로 잠시 '외도'
은퇴 후 장재근은 소속사였던 한국전력 장위동 지점으로 자리를 옮겨 요금 관련 부서에서 일을 했지만, 트랙을 달리던 그에게 사무실 근무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월급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육상 코치를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개국을 앞둔 SBS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침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에어로빅을 해보자는 것. 장재근은 "하루 일당이 10만 원인데, 주 5일짜리라 수입이 괜찮았다"며 "딱 1년만 하고 호주로 유학 갈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떠나지 못했다. "돈을 너무 많이 벌다 보니 돈의 노예가 됐던 것 같다"던 장재근은 "2년쯤 하고 나니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어 혼란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고민 끝에 육상으로 돌아가 심판을 봤다. 초반엔 "돈 벌겠다고 홀딱 벗고 에어로빅하던 놈이 이제 와서?" 라는 시선이 없지 않았지만, 1년 정도 지나니 육상계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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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근 전 진천선수촌장이 지난해 8월 프랑스 파리 코리아하우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선수단 결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파리=서재훈 기자
지도력 인정받고 진천선수촌장까지
2019년 서울시청 육상팀 감독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친 장재근은 2023년 진천국가대표선수촌장으로 복귀했다. "고향 같은 선수촌을 제대로 된 공간으로 만들겠다"며 의지를 불태웠지만 △새벽 훈련 △산악 구보 △밤 12시 인터넷 차단 등을 단행했다가 '구시대적 프로그램'이라는 반발을 샀다. 장재근은 "막상 선수촌에 가보니 숙소를 PC방처럼 꾸며놓고 밤새 게임을 하거나 밤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는 선수들도 꽤 있었다"며 "오죽했으면 '진천리조트'라는 말까지 나왔겠느냐"고 한탄했다.
칼을 빼든 장재근은 "선수촌은 세금으로 나라를 대표할 선수를 기르는 곳이지 편하게 놀면서 몸 만들러 오는 곳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지도자와 선수들의 불만은 물론이고, 부모 민원까지 쇄도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랏돈으로 호의호식하려거든 나가라"고 했다.
장재근은 그렇게 역대 최저 성적이 예상됐던 2024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 13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0개로 전체 8위로 이끌며 2년 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지난 2월 퇴임식을 가진 장재근은 여전히 현장이 고프다. 그는 "아직 내가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촌장직을 하면서 행정에 흥미를 많이 느꼈다"며 "언제든 현장으로 돌아갈 준비는 다 돼있다. 내가 필요한 순간에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기자 admin@reelnara.info



























